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태(이기태)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97409
  • 전몰일자 : 19510201

공훈사항

이기태 일병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6월 27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1보병사단에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이기태 일병이 전선에 투입될 당시 국군은 철수와 방어로 이어진 수세적인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방어에서 일시 공격으로 전환하여 혼성대대 병력이 동두천을 탈환하고 소요산까지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곧 이은 북한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의정부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를 비롯한 장병들은 의정부-창동-미아리 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인해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후 6월 28일부터 한강선 방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이기태 일병과 장병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지연작전을 실시하여 1950년 7월부터 낙동강선 방어 작전에 돌입하였다.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이 일병과 연대병력은 북진작전에 돌입함으로써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해 한・만 국경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으나,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선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와 일부병력은 불법 개입한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으며,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직전까지 북한군과 몇 차례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양측은 주요 고지를 놓고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였다.
이 일병이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을 방어하던 이기태 일병은 중공군의 공세에 따른 방어 작전에 참여하여 임무를 수행하다 1951년 2월 1일 동두천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39면-21559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5-ㄴ-02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