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철(李奇徹)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712

공훈사항

이기철 순경은 1933년 9월 14일 전남 나주군 금천면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전남도경 함평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여수에서 전사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7월 4일 한강방어선을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함평경찰은 함평-영광, 함평-광주, 함평-무안, 함평-나주를 잇는 주보급로 경비, 피난민 이동·통제 구호, 주요 시설 경비, 오열 색출 임무를 수행했다.
7월 23일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남으로 진격함에 따라 함평경찰은 지연전을 펼치며 나주-보성을 거쳐 7월 25일 순천에 도달했다. 7월 23일 북한군이 광주로 진격하자 아군 군경부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후퇴했으며, 함평경찰은 장흥-순천을 거쳐 함안으로 기동했다. 이후 9월까지 이곳에서 북한군 제6·7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9월 16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선이 북상하면서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전개되었다. 함평경찰은 10월 초 함평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와 잔적소탕작전을 수행했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광산경찰은 10월 초 광산경찰서를 수복하고 지역 내 치안유지와 잔적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은 가까운 산지로 들어가 공비들과 합류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 작전기간(1차: 1951.3.10-4.10, 2차: 1951.4.15-5.5, 3차: 1951.7.15.-8.15)을 설정하여 전국적으로 공비섬멸작전을 시행토록 했다. 이 순경은 제1-제3차 공비섬멸작전에 참가하여 공비섬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작전이 끝난 후 이 순경은 서남지구 전투부대에 편성되어 제1기(1951.12.1.-12.14), 제2기(1951.12.16.-1952.1.4.), 제3기(1952.1.5.-1.31), 제4기(1952.2.4.-3.14) 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 순경은 이 작전 종료 후 함평으로 복귀하여 치안유지 활동을 해오다가 1952년 7월 12일 함평군 기각면에 공비들이 출현함에 따라 명에 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함평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피·아 간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철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00-ㄹ-028)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