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찬(李基讚)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917

공훈사항

이기찬 순경은 1924년 2월 19일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서울시경 용산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경북 고령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제8·제18연대와 독립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6월 26일 의정부가 점령되어 서울이 위협을 받게 되자 서울시 비상경비사령부 산하 경찰병력 7,105명(이 순경 포함)이 서울 방어를 위해 군경합동작전에 참가하여 서울 외곽에 배치되었다.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했다. 6월 30일 1개 대대규모의 적이 오류동을 목표로 공격을 하자 7월 1일까지 피·아 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했다. 그러나 7월 3일 전차 17대를 앞세운 적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영등포를 비롯한 오류동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서울의 경찰부대는 7월 3일 수원으로 철수한 다음 이 순경을 포함한 서울경찰병력 500명은 7월 4일 천안지구를 경비하는 임무에 들어갔고, 100명은 평택 주둔 미군(스미스부대)부대 경비를 지원했다.
북한군의 계속적인 남진으로 인하여 서울경찰병력은 국군과 함께 지연전을 펼치며 남원-진주를 8월 10일 고령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이 순경이 소속된 경찰부대는 고령 고곡리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오열 색출과 탄약집적소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9월에 들어서자 초조해진 북한군이 9만 명의 병력으로 왜관-다부동-영천-경주 방면에 또 한 번 대공세를 취하여 한때 대구 근교 12km 지점까지 접근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대구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경찰이 끝까지 대구에 남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기여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유엔군의 반격작전이 개시되면서 경찰관서 수복작전이 시작되었다. 용산경찰병력이 9월 17일 밀양을 지나갈 무렵 잔적의 공격을 받고 교전이 벌어졌다. 이 순경은 적을 격퇴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찬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50판-2면-25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으며,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4-ㅌ-05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