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진(李基震)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322687
  • 전몰일자 : 19510225

공훈사항

이기진 하사는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면서 조국이 다시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섰다. 이 하사는 1950년 12월 초순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5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37도선 상에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 제3차 공세 때 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혼성부대들이 일제히 공격을 재개했고, 특히 북한군 제10사단이 홍천-구성을 목표로 집중 공격을 가했다. 사단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상급부대 계획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이어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하고, 제2군단이 경북 안동까지 종심 깊게 침투함에 따라 사단은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이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 일대에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 침투부대를 격멸하기 위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이때 공병대대도 진지구축을 하면서 영월 일대에 대한 수색정찰작전을 병행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함에 따라 제3군단은 제3사단 제23연대를 제7사단에 배속하여 영월을 탈환하도록 했다. 사단은 1월 19일 만경대산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20일 영월 탈환의 관건이었던 응봉산을 공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점령했다. 이어 사단은 24일 영월로 진격하여 이를 탈환하고 퇴각하는 적을 섬멸했다. 1월 25일 사단은 공세로 전환했고, 2월 초순까지 횡성 동북방의 창동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2월 11일 횡성-원주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개시했고, 횡성 일대에 배치되었던 사단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되면서 평창 일대까지 밀려났다. 이 하사는 공병대원으로서 방어전투 때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장애물을 설치했고, 공격 시는 가장 선두에서 적의 장애물을 제거해 왔다. 그는 이 전투에서도 마지막으로 남아 교량을 파괴하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2월 25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진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08판-4면-26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1-ㅇ-10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