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준(李基晙)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3301108
  • 전몰일자 : 19500625

공훈사항

이기준 일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전 38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잦았던 시기인 1950년 1월 하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육군직할 제1보충대로 배치되었다. 同 보충대는 1949년 9월 15일 경기도 수원에서 창설되어 신병 보충 업무를 수행했다. 북한의 남침징후가 높아짐에 따라 육군본부는 경계강화 지시를 수차례에 걸쳐 거듭 하달했고, 장병들의 보충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기준 일병은 입대한 장병들을 부대까지 이송하는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6사단(-)은 개성을 점령한 뒤 6월 25일 저녁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를 추격하여 영정포, 강녕포 일대에서 도하준비를 했다. 북한군의 도하 징후를 포착한 육군본부는 급히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도하한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를 포함하여 남산학교, 보병학교, 공병학교, 보충대, 보국대대 등 서울 인근의 가용 병력을 혼합 편성하여 적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에 제12연대 제2대대, 기갑연대 혼성대대, 보국대대, 보병학교 후보생대대 등이 긴급 편성되어 김포반도의 한강 남안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때 보충대는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에 편성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한강 남안에 배치된 이들 부대들은 임시로 긴급 편성되었기에 통신 수단이 강구되어 있지 않아 인접에 어느 부대가 배치되었는지도 서로 알지 못한 채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직적인 방어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6월 26일 밤부터 도하 공격을 개시했고, 6월 27일 오전에 아군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아군 부대들은 제각기 철수했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는 좌측방이 공격을 받고, 적이 후방으로 침투함에 따라 오전 11시에 철수하여 장림-운유산 선의 장림 삼거리 북쪽의 구릉지 일대를 점령하여 적의 전진을 막고자 했다. 당시 혼성 대대원들이 장비한 99식 소총은 격발장애가 많았고, 탄약도 제한되어 대대원들은 거의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기준 일병이 소속된 혼성대대원들은 적의 전진을 막아보고자 안간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후 1시를 전후하여 장림 선이 무너지자 후보생대대는 김포읍 쪽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이기준 일병은 진지를 사수하면서 적의 전진을 저자 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준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3판-4면-143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9-ㅇ-062)에 그의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