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준(李基俊)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3301
  • 전몰일자 : 19501220

공훈사항

이기준 일병은 경상남도 사천군(現 사천시) 축동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최후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을 준비 중이던 1950년 9월 중순경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5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육군직할 제8352부대로 배치되었다.
(*전사자 명부에 제8352부대는 고유명칭 확인이 불가능하므로 입대부터 전사 당시까지 6·25전쟁의 전반적인 경과 위주로 기술)
이기준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및 두만강으로 진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반격으로 전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의 전 전선에서 북으로 도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한 후, 북진을 계속해 한・중 국경선에 도달했다.
마침내 서부전선에서는 제6사단 제7연대가 10월 26일에 평안북도 압록강변의 초산 일대까지 진격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제3사단 제22연대가 11월 21일에 함경북도 압록강 상류 혜산진 일대까지 점령했고 수도사단(-2)이 11월 30일에 청진 북방 부령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10월 24일과 11월 24일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적인 대규모 공세에 밀려 38도선까지 철수하여 방어에 임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에 또 다시 후퇴하여 평택-제천-삼척을 연하는 37도선 일대까지 철수했다.
전투력을 복원한 국군과 유엔군은 제2차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38도선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이기준 일병과 부대원들은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기 전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몇 차례의 공방전을 전개했다. 이기준 일병은 분대원과 함께 중공군의 참전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는 중 1950년 12월 20일 중공군의 침투부대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준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2판-7면-21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4-ㄷ-06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