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운(이기운)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811402
  • 전몰일자 : 19520708

공훈사항

이기운 일병은 1927년 4월 19일에 충청남도 서산군 서원읍(訂正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서원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지속되면서 고지 쟁탈전이 진행되던 1952년 4월 1일 입대하여 충청남도 논산에 위치한 육군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보병학교 교도대 조교요원으로 배치되었다.
이기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둔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보병학교는 육군 간부 육성을 위하여 전념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육군보병학교는 1949년 7월 29일 경기도 시흥에서 육군본부 직할로 창설되었다. 보병학교는 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후퇴하면서 1950년 7월 8일 임시로 폐교됨과 동시에 전북편성관구사령부에 편입되었다. 그 후 동년 8월 7일 대구에 있는 육군중앙훈련소 내에 재개교되어 8월 15일 경상남도 동래로 이동하여 육군사관학교와 병합되었다. 그리고 동년 8월 21일 육군제병학교로, 9월 7일 육군종합학교로 개칭되었고, 1951년 2월 17일 또다시 육군보병학교로 환원 개칭되었다. 그 후 보병학교는 10월 27일에 전라남도 광주로 이동하고, 1952년 2월 19일부로 육군본부 직할로부터 육군교육총감부로 예속되었다.
보병학교 교도대가 위치한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지방 좌익 빨치산 세력들과 연계하여 유엔군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남하하자 이들의 습격, 파괴활동은 더욱 극심해졌다. 광주는 호남선과 및 국도가 발달되어 있고, 군사학교들이 위치하여 있어 적 게릴라들의 타격 목표가 되곤 했다. 교도대는 조교를 비롯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응해 왔다.
이기운 일병은 1952년 6월 하순경 보병학교로 침투한 적 정찰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중 적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전라남도 광산에 위치한 제77육군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정성스럽게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7월 8일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운 일병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3판-39면-2154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ㅈ-109)에 그의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