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욱(李基旭)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4257
  • 전몰일자 : 19510517

공훈사항

이기욱 대위는 1925년 7월 21일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12월 7일에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입교하여 6개월 간의 소정의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하고 1949년 5월 23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서울 용산의 제17연대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제17연대는 동년 11월 15일에 옹진반도로 투입되어 38도선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제17연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병력의 열세로 26일 아침에 인천으로 철수한 후 대전으로 이동하여 육본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보은-상주 일대에서 지연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8월 중순에 낙동강방어선에서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소속으로서 기계-안강지역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 연대는 9월 12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9월 15일부터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에 후속부대로 참가했다.
이기욱 대위가 소속된 제17연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되어 9월 18일에 인천으로 상륙한 후에 영등포 남쪽으로 기동하여 서울의 동쪽 지역을 탈취했다. 이후 유엔군의 주력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작전을 감행할 때, 연대는 서울에서 주요시설에 대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국군은 11월 7일에 제2사단을 재창설했다. 제2사단은 제17연대와 새로 창설된 제31, 제32연대를 예하 부대로 편성했다.
이기욱 대위는 당시 제31연대 중대장 요원으로 전속되었다. 제2사단은 포천-평강 일대에서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던 북한군 잔적소탕을 실시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11월 말에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 일대로 철수할 때, 제2사단은 12월 8일부로 양문리-탑두울 지역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사단은 1950년 12월 31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청평을 거쳐 단양으로 이동하여 병참선경계를 실시했고, 1951년 2월 13일에 안동 일대로 이동하여 후방교란을 일삼던 북한군 제10사단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기욱 대위가 소속된 제2사단은 안동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마치고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군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고 38도선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 징후들이 포착되어 사단은 방어로 전환했다. 예상대로 중공군 5월 공세가 5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중대장으로서 중공군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선두에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5월 17일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욱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1면-7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ㅍ-00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