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우(이기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5702545
  • 전몰일자 : 19510313

공훈사항

이기우 일병은 1929년 4월 27일에 강원도 양양군 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9월 10일, 경남 진해에서 창설된 육군포병학교로 입교하여 소정의 군사훈련과정을 수료한 후에 포병학교에 조교로 남았다가 얼마 후 제50포병대로 전속되었고, 포병대는 제6사단을 직접 지원했다.
이기우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중순, 제6사단은 성천-순천 일대에서 북진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실시된 인천상륙작전과 호응하여 9월 16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제6사단은 낙동강 선에서 함창-문경-충주-원주-춘천 방향으로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5일에 38선을 돌파했다. 계속 김화-성천-순천-개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10월 23일에 평안북도 희천까지 진격했다.
이기우 일병이 소속된 제50포병대는 10월 24일부터 개시되는 유엔군의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 제6사단을 직접 지원하여 압록강 변의 벽동까지 진출했다. 이때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청천강 선 이남의 개천으로 후퇴했다. 이후 사단은 영원-덕천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2군단의 예비로 차후 작전을 준비하여 11월 24일에 제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했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받고 38도선으로 철수했다. 제6사단은 38도선의 전곡-백의리 일대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실시하여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에서 철수하여 평택-삼척을 잇는 선까지 후퇴했다. 이후 중공군은 2월 12일에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고, 이때 제6사단은 문막 북쪽의 판대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특히 사단은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기우 일병이 소속된 제50포병대는 제6사단을 직접지원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제50포병대는 3월 13일에 북한강을 건녀 북배산 방향으로 반격 시에 포병화력 지원을 하던 중 적 침투부대의 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로 격퇴했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우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5판-8면-25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5-ㅋ-7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