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완(이기완)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2302260
  • 전몰일자 : 19510212

공훈사항

이기완 일병은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격렬한 총공세를 격퇴하던 시기인 1950년 8월 27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출생 일자 및 출생지 미상).
이기완 일병이 배치된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되었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어 청천강 남쪽의 신안주 부근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사단은 11월 20일 태천-구성-삭주-신의주로 진출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27일을 전후하여 연대가 방어 중인 대령강 동쪽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선 그와 연대 장병들은 태천 동남쪽의 학봉동, 기우산, 토라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펼쳤으나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기완 일병과 연대병력은 박천 북쪽의 충막동-봉지리 선으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측후방 돌파를 기도하던 중공군을 격퇴한 후 용산동 일대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공세가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하였다. 이 일병과 장병들은 신정 공세 이후 계속된 철수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지연전을 펼치며 고갈된 피해를 회복하고 부대정비를 거쳐 2월에 총공세로 전환하였다. 그와 연대 장병들은 한강 남쪽으로 진출한 이후 한 달여 동안 서울을 목전에 두고 한강철교-영등포에 이르는 여의도에 배치되어 경계와 잔적 소탕작전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 일병은 일부 병력과 정찰 도중 북한군 정찰대와 마주치게 되어 쌍방 간에 수 시간 동안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기완 일병은 적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1951년 2월 12일 한강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33판-39면-2153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10-ㅋ-08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