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완(李基完)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0719101
  • 전몰일자 : 19510508

공훈사항

이기완 이병은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후퇴하여 쌍방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3월 20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이기완 이병이 전선에 투입될 당시 연대는 동부전선의 경강국도에서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 무렵 험준한 태백산맥을 따라 북상한 북한군 패잔병들이 이 이병과 연대병력의 후방지역으로 접근하여 먼저 이들을 소탕하였다. 3월 18일을 전후하여 소탕작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실시하게 되었다.
북한군 제69여단은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를 증원받아 양양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악으로 연결된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적인 거점을 확보하고 이기완 이병과 연대병력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극력 저항하였으나 미 함정의 집중적 함포사격에 의한 병력손실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연대병력의 진출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기완 이병과 연대병력은 평창 일대에서 대관령 방향으로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설악산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하고, 이어 5월 7일에는 인제군 일대에 배치된 국군 제3군단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5월 공세를 감행하였다. 그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지를 함락당하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기완 이병은 1951년 5월 8일 인제 부근 전투에 참가하여 부여된 작전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최후까지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완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04-ㅈ-08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