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엽(李基燁)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81215
  • 전몰일자 : 19510508

공훈사항

이기엽 일병은 1933년 8월 14일 평안남도 강동군 운용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총공세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던 때인 1950년 12월 20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이기엽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박천 북쪽의 충막동-봉지리 선으로 철수하여 저지 진지를 구축하여 측 후방 돌파를 기도하던 중공군을 격퇴한 후 용산동 일대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공세가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37도선 평택까지 철수하였다. 이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신정 공세 이후 계속된 철수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지연전을 펼치며 고갈된 피해를 회복하고 부대정비를 거쳐 2월에 총공세로 전환하였다. 그와 연대 장병들은 한강 남쪽으로 진출한 이후 한 달여 동안 서울을 목전에 두고 한강철교-영등포에 이르는 여의도에 배치되어 경계와 잔적소탕 작전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1951년 3월부터 이기엽 일병은 서울에서 북상하여 진격하였고 고양 임진강 전투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어 4월 21일에는 임진강 북쪽의 대덕산-백학산-강정리를 연하는 선에서 정찰 활동에 주력하면서 오금리-마지리 간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도 강화하였다. 다음날인 4월 22일 해가 지고 저녁 8시를 전후하여 중공 제64군은 일부 병력으로 임진강 북쪽에 진출한 연대의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 공격을 하였으나 장병들의 투혼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기엽 일병과 연대병력은 5월 6일 능곡 일대로 진출하여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7일 새벽 6시에 미 제3사단의 엄호하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연대는 주변 저지대를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일산 북쪽 고봉산(209고지) 일대에 강력한 방어거점을 구축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공격이 일시 돈좌 되었으나 이날 오후에 강력한 항공폭격과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5시간 동안 혈전을 펼쳐 적을 고봉산에서 격퇴하였다.
이 일병은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앞장서서 싸우는 용맹을 발휘하였다.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이기엽 일병은 1951년 5월 8일 고봉산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엽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13-ㅂ-06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