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열(李基烈)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400777
  • 전몰일자 : 19511215

공훈사항

이기열 일병은 1929년 8월 12일에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준비하던 1950년 9월 중순,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직할부대인 통신대로 배치되었다.
제2사단은 11월 7일부로 서울에서 재창설되었으며, 이후 12월 중순에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추후 예상되는 중공군 공격에 대비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 서울을 압박했다. 사단 장병들은 다음날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1월 7일에 충주에 집결했다. 이후 2월 13일에는 안동으로 이동하여 후방지역 공비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제2사단은 공비소탕작전을 완료하고, 4월 28일에 다시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어 청평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하고, 재반격작전에 참가하여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자, 유엔군사령관은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킴과 동시에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방어진지 전방에 대한 공세적인 행동을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진지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8월 2일 공격을 목표를 탈취했으나, 중공군의 야간 역습으로 다시 빼앗겼다. 이러한 공방전은 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고지를 탈취하는데 실패했다. 이후 9월 1일부터 3일까지 다시 공격하여 74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사단은 10월 13일에 김화-금성진격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8일까지 연대별로 교대로 공격하여 김화 북쪽 14km에 있는 금성까지 진출하여 금성천 분지를 확보했다.
이기열 일병이 소속된 통신대는 전방 연대를 원활히 지원하여 사단과 통신망을 잘 유지토록 하여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통신대는 원활한 통신소통을 보장하기 위해 수시로 통신선로를 점검했다. 그러던 중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12월 15일 작전지역 내로 통신선로 점검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열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1면-28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0-ㅎ-00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