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열(李騏烈)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16062
  • 전몰일자 : 19510415

공훈사항

이기열 대위는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949년 7월 15일 육군사관학교 제9기로 입교했다. 이 대위는 6개월간 교육훈련을 받고, 1950년 1월 14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대위는 1950년 3월까지 경북지역에 침투한 공비 소탕작전에 앞장섬으로써 북한군의 후방교란 기도를 분쇄하는 데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22연대는 서울로 이동하여 고양 일대에서 북한군 제1사단과, 한강방어선의 금곡리, 풍덕천 일대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조치원-청주-보은 일대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의 남진을 저지했다. 연대는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하여, 7월 26일부터 9월 14일까지 강구, 영덕, 흥해, 포항, 형산강 일대에서 북한군 제5사단과 공방전 끝에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총반격태세로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작전으로,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연대는 평해-울진-삼척-강릉으로 진격,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했다. 연대는 10일 원산을 확보한 후 잔적을 소탕했다. 이후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30일 선두부대가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대는 12월 10일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 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는 평창으로 철수했다. 연대는 1951년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연대는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2월 21일 시작된 유엔군의 킬러작전 때, 연대는 봉화산을 탈취하기 위해 3월 1일부터 4일까지 혈전을 벌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3월 7일부터 31일까지 리퍼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3월 28일까지 38도선 상의 현리-하서림을 연하는 선을 확보했다.
유엔군은 4월 3일부터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 확보를 목표로 러기드작전((Operation Rugged)을 개시했다. 이때 제3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적의 가벼운 저항을 물리치고 북진했고, 4월 20일까지 강원 인제군 한계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캔자스선을 확보했다. 이 작전에서 이 대위는 중대원을 진두지휘하여 솔선수범 앞장서서 진격하다 4월 15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열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위패(22판-1면-280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6-ㅈ-08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