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기식(李起植)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3543
  • 전몰일자 : 19510209

공훈사항

이기식 일병은 경상북도 월성군 감포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던 1950년 10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7연대로 배치되었다.
이기식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1월 중순, 제6사단은 국군 제2군단의 예비로 영원 일대에서 유엔군의 2차 총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11월 24일에 2차 총공세를 실시했으나, 이번에도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아군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아군은 압록강을 향해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38도선 일대로 후퇴했다. 사단 장병들은 12월 11일에는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를 잇는 고지군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방어했다.
대규모 병력을 이룬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를 시작했고, 이에 제6사단은 다음 날인 1951년 1월 1일 아침 8시까지 정면의 적은 격퇴했지만, 방어진지 측후방으로 침투한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사단은 조금 더 방어진지를 지탱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방어진지로부터 철수하기로 했다. 박만순 일병이 소속된 제7연대는 덕정리를 거쳐 의정부 및 서울 창동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월 2일에 경기도 광주로 이동하여 한강 남안 일대를 점령했다. 반면 중공군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을 목표로 급속하게 진출하여 1월 3일에는 의정부, 1월 4일에는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쪽으로 진출을 기도했다.
이기식 일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1월 4일에 광주 부근의 한강방어선에서 철수하여 1월 7일에 평택-안성-장호원을 잇는 고지군으로 이동하여 죽산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반면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 전력이 소진되어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유엔군은 1월 15일부터 적정을 파악하기 위해 울프하운드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중공군 선두부대가 수원-이천 선에서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6사단은 2월 초순에 문막 북쪽의 판대리 부근으로 방어진지를 조정한 후 후방교란을 일삼던 북한군 잔적 소탕임무를 수행했다. 이에 이기식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2월 9일에 방어 종심지역으로 수색작전을 나갔다가 적 패잔병 무리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기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7판-6면-11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3-ㅇ-03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