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래(朴相來)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171848
  • 전몰일자 : 19511020

공훈사항

박상래 하사는 1932년 7월 25일에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1950년 10월 하순, 경북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19연대에 배치되었다.
박상래 하사가 부대로 전입했던 11월 하순, 제6사단의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제6사단은 동두천 북방의 전곡-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사단 장병들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에 맞서 강력히 저항했으나, 전투력이 열세한 가운데 후방이 차단되어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1951년 1월 6일에 장호원 부근 적산리 일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2월 초에 병력배치 조정에 의해 제6사단은 문막 북쪽의 판부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후 박상래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2월 11일에 시작된 중공군 2월공세, 4월 22일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공세적인 방어로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5월 20일부터 용문산 방어진지로부터 반격하여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 이남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함으로써 철의 삼각지대의 우측 지역인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고, 장병들은 방어진지 보강과 수색작전에 집중했다.
1951년 가을이 되면서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지연하면서 군사력 증강에만 몰두하자, 유엔사는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각 부대에 공세행동을 명령했다. 이에 제6사단은 9월 21일에 제2연대가 주방어선 전방의 819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했고, 이어서 박상래 하사가 소속된 제19연대가 9월 24일에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28일에 819고지를 탈취했다. 그리고 사단은 10월 13일부터 금성천 분지를 확보하기 위해 백암산에서 금성천을 건너 중공군을 격파하고, 10월 21일에는 교암산-송설리-송동리까지 진출했다. 그는 분대장으로서 10월 20일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44-ㅁ-06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