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남(박상남)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8690039
  • 전몰일자 : 19530210

공훈사항

박상남 이등상사는 1929년 11월 22일에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 동구) 충창로 94번지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조국에 헌신하기 위하여 1949년 11월 16일 육군직할 광주병사구사령부에 입대했다.
병사구사령부는 병무행정기관으로 1949년 9월 각 도에 설치되었다. 병사구사령부는 장병들의 병적 정리·관리, 학도들에 대한 학생 군사훈련 시행, 군인과 가족 및 노무자들의 원호사업을 담당했다. 이 기구는 한국군 병력의 추가 징집의 제한, 예산 제약 등으로 1950년 3월 해산되었다. 이때 박상남 이등상사는 육군병참단으로 전속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진하자 육군병참단은 각 전투부대를 밀접히 지원하면서 6월 27일 용산을 떠나 안양-수원-평택을 거쳐 7월 5일 대전으로 이동하였고, 7월 11일 김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했다. 육군병참단은 7월 23일 포항 백원에 보급소를 설치하여 전선의 부대들을 적시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7월 30일 광주지구보급창 요원으로 마산에 마산보급소를 설치 운영하였고, 7월 31일 부산에 부산기지창을 창설하여 다량으로 입항되는 군수품의 원활한 하역과 전방 보급지원을 추진했다.
육군병참단은 9월 5일 부산에서 묘지등록대를 예하부대로 창설하여 전선에서 속출하는 전사자를 원활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또한 9월 11일 제5, 6자동차대대를 창설하여 폭증하는 수송 수요를 충당했으며, 9월 20일 제2폐품수집중대를 창설하여 각종 군수품 폐품을 수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함에 따라 육군피복창이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그리고 국군 부대들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자 10월 3일 강릉에 강릉보급소가 창설되었다. 육군병참단도 전방 부대들을 보다 밀접히 지원하기 위해 10월 11일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했다가 12월 부산으로 다시 이동했다.
1951년 1월 23일 제179병참단이 창설되면서 보급업무를 전담하고, 육군병참단은 1951년 2월 10일 부로 제279병참단으로 개칭되었고 보급업무 이외의 병참업무를 담당했다. 그 후 1952년 9월 27일부터 제179병참단을 제1병참단으로, 제279병참단을 제2병참단으로 개칭했다. 육군본부는 1952년 11월 27일부터 제1병참단은 대전 이북지역, 제2병참단은 대전 이남지역 병참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박상남 이등상사는 제2병참단 소속으로 1953년 2월 10일 부산시 다대포 부근에서 보급 추진을 위해 준비하는 중에 적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적들을 격퇴함으로써 군수품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남 이등상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6판-5면-075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7-ㅋ-014)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