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규(박상규)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9600909
  • 전몰일자 : 19501126

공훈사항

박상규 하사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이 낙동강 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하사는 8월 중순, 제6교육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육군본부는 8월 20일 대구에서 제3·5·8연대와 제5포병대대를 예하부대로 하여 제7사단을 창설했고, 이때 제3연대는 육본 직할 제1유격대대를 근간으로 재창설되었다.
제7사단은 미 제8군 예비로 재편성과 교육훈련을 마치고 신녕지구 전투에 투입되어 적의 남진을 저지했다. 9월 2일 개시된 북한군 9월 공세에서 제12사단은 총공격을 개시해 안강을 점령하고 경주를 목표로 남진했다. 연대는 9월 3일 수도사단에 배속되어 열차 편으로 긴급히 이동하여 안강읍 사방동 일대에 집결했고, 박 하사와 연대 장병들은 그 서측의 무릉산 일대에 곧바로 배치되었다. 연대는 9월 6일부터 13일까지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의 마지막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추격작전 때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청량리에 도착했다.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연대는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비호산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연대 장병들은 7일까지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고 비호산을 지켜냈다. 연대는 비호산을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중공군과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1월 14일 연대는 덕천으로 진격했고,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계획에 따라 11월 22일 묘향산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대는 26일 묘향산 남방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악전고투 끝에 27일 순천 일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박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11월 26일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규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11면-695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7-ㄷ-06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