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규(朴相奎)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0984
  • 전몰일자 : 19510518

공훈사항

박상규 일병은 1930년 1월 17일에 경상남도 통영군 일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를 격퇴한 1950년 9월 1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카투사(KATUSA) 병으로 분류되어 미 제2사단에 배치되었다.
박상규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0월 초순, 미 제2사단은 합천-거창-전주-논산-강경 방향으로 북한군을 추격하여 9월 30일에 강경을 탈취하고, 덕유산 및 지리산 일대로 숨어 들어간 잔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11월 2일부로 국군 제11사단에 인계하고, 북상하여 11월 15일에 개천 및 군우리 지역에 투입되어 공격준비를 했다. 당시 유엔군은 적정을 모른 채 11월 24일에 2차 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를 실시하였으나, 이번에도 중공군 제40군단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되어 11월 27일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박상규 일병이 소속된 미 제2사단은 11월 29일에 군우리에서 철수하여 협곡지대인 일명 '태형의 계곡'을 통과하던 중 중공군 제42군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 상태에 이럴 정도로 큰 피해를 받고 12월 1일에 순천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후 12월 중순에 영등포에 집결하여 부대 정비를 실시한 후 충주 일대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를 하며 미 제8군의 예비임무를 수행했다.
중공군이 12월 31일 야간에 총공세를 실시하여 유엔군이 평택-삼척을 잇는 선으로 철수할 때, 미 제2사단은 원주 동남쪽 고지군에 투입되어 1월 6일부터 12일까지 고수함으로써 유엔군에게 반격의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후 2월 1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맞아 지평리전투에서 제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주변 고지군을 활용한 전면방어로 고수했다. 이에 중공군은 지평리와 원주 일대에서 막대한 손실을 받고 물러서자, 유엔군은 2월 21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하였고, 미 제2사단은 원주-횡성-홍천-춘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4월 9일에 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미 제2사단은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5월 공세 시에 벙커고지(800고지)에서 중공군으로부터 3면에서 공격을 받았으나 5월 18일까지 격퇴하는 데 성공하여 적의 돌파구 확장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90-ㅂ-07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