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규(朴相圭)

  • 군별 : 육군
  • 계급 : 소령
  • 군번 : 12153
  • 전몰일자 : 19501205

공훈사항

박상규 소령은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1945년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는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군입대를 결심하고, 1948년 5월 초순에 서울 태릉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제7기로 입교했다. 이곳에서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1948년 11월 11일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소령이 제1사단에 배치되어 중대장으로 부임할 때 전선의 상황은 험난하였다. 당시 사단은 철수와 지연전을 반복하며 낙동강 방어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1950년 8월에 접어들어 고령에서 함창에 이르는 낙동강 전선에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큰 수훈을 세웠다. 그때부터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박상규 소령의 지휘 아래 연대병력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하였다. 조국 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후 10월 24일 박천-운산 도로와 태천-영변 도로의 교차지점인 용산동 남쪽 1km 지점에서 북한군은 전차로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을 배치하여 완강히 저항하고 있었다. 박 소령의 진두지휘하에 25일 아침 운산에서 수풍호로 진출할 목적으로 전차를 앞세우고 2개 연대병진 대형으로 공세를 개시하였다.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한 지 닷새째인 11월 28일 태천 외곽까지 진출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에 밀려 박천 북쪽의 중막동-용산동 선을 점령하였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적의 대규모 공격은 없었으나 중공군의 재배치 상황에 따라 12월 4일 1번 도로를 따라 평양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박 소령은 위기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두지휘하며 전투에 임했던 박상규 소령은 1950년 12월 5일 평양 철수작전 시 적이 투하한 포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규 소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7판-1면-22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2-ㄱ-07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