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구(朴相九)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5862
  • 전몰일자 : 19500815

공훈사항

박상구 일병은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선으로 철수를 거듭하고 있을 때인 1950년 7월 11일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박상구 일병은 미원 전투에 투입되었다. 1950년 7월 16일 미명 미원 북방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부흥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한때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북한군의 진출을 더이상 허용하지 않고 저지하였으며, 다음날에도 전차 3대와 장갑차 12대로 전력을 증강하여 공격을 재개한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제2군단의 집요한 공격에 밀려 박 일병과 장병들은 다시 미원 남쪽으로 진지를 전환하였다.
박상구 일병과 연대병력은 7월 21일 전선정리계획에 따라 춘양으로 진출하려던 중 화령장의 상황이 확대되자 보은에서 화령장으로 투입되어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박 일병을 비롯한 연대병력은 8월 12일부터 다부동-군위 일대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13일 다부동 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연대는 신주막 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3사단 일부 병력이 약목 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여, 북한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으로 진출 중인 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 병력을 우회시켜 미쳐 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어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전차 7대를 앞세운 북한군 연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 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는 동안 삶과 죽음의 감각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던 박상구 일병은 1950년 8월 15일 다부동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4판-3면-01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1-ㄹ-01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