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구(朴相九)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병
  • 군번 : 1021260
  • 전몰일자 : 19501104

공훈사항

박상구 이병은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읍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국군이 낙동강 선까지 철수하자 조국을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이병은 1950년 8월 하순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8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이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여 낙동강방어선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천전투에서 적과 공방전 중이었다. 사단은 9월 5일부터 9일까지 영천 동북방의 조교동과 영천 남방의 오수동, 채약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9월 10일 반격으로 전환하여 13일까지 적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적 제15사단을 포위 격멸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 최후의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만들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국군은 9월 16일부로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9월 19일 연대는 수도사단 제18연대와 함께 합동으로 기계 일대 561고지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국군은 9월 22일부로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충주를 거쳐 10월 8일 양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율리를 거쳐 18일 승호리 일대에서 대동강을 건너 김일성대학과 모란봉 일대로 진격했다. 연대는 20일 저항하는 북한군 제17, 제32사단의 잔적을 소탕하고 평양을 탈환했다. 이로써 연대 장병들은 제1사단과 더불어 최초로 평양을 점령한 부대원이 되는 영광을 안았다.
10월 29일 북진을 계속한 연대는 개천을 거쳐 11월 1일 군우리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 온정리와 운산에서 아군을 격파한 중공군 제38군이 청천강 이북의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하고, 북상하는 아군 증원부대를 차단하려 했다. 이에 아군은 구장동-덕천 간의 진지를 점령해 중공군을 저지하고자 했고, 사단은 11월 1일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중공군의 역습에 밀려 후퇴했고,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 일대를 점령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3일 연대는 중공군 제112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7일까지 적과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비호산을 지켜냄으로써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박 이병은 끝까지 진지를 지켜내며 용감하게 싸우다 11월 4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구 이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그의 유해(41묘역-1판-1583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0-ㅈ-01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