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상구(朴相球)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1704137
  • 전몰일자 : 19501025

공훈사항

박상구 병장은 1934년 1월 10일에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으나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12월 30일, 강원도 춘천의 제7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그는 사단 직할부대인 통신대로 전속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홍천 축선을 담당하고 있던 제2연대를 직접지원했다.
제6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신속히 전방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춘천과 홍천 북방에서 북한군 공격을 3일간이나 지연하고, 6월 29일에 철수하여 이후 7월 한 달 동안 충주-문경-함창 축선에 지연전을 수행하고, 8월 3일에 용기동∼교안동∼307고지를 연하는 능선의 낙동강 선에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박상구 병장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사단과 연대 간 통신을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전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당시 제6사단은 정면의 조림산에서 북한군을 섬멸한 후 추격하기로 했다. 당시 북한군은 조림산 일대에서 강력히 저항하다가 9월 22일 야간에 퇴각했다. 이때부터 제6사단은 도망가는 북한군을 추격했다. 9월 23일부터 함창-충주-원주-춘천 방향으로 공격하여 10월 5일에는 춘천 북방의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이후 사단은 10월 8일에 화천을 점령했고, 이어서 김화-금성-신고산-덕원-마식령-양덕 방향으로 북진하여 10월 19일에 성천을 점령했다. 그리고 10월 21일부터 진격 방향을 바꾸어 순천-개천-희천 방향으로 공격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제2연대와 함께 하며 사단과 연대 간의 통신 유지를 위해 전장을 누비며 동분서주했다.
유엔군은 10월 24일부터 압록강을 향한 1차 총공세(일명 추수감사절 공세)를 펼쳤다. 이때 제2연대는 10월 24일에 온정리를 거쳐 압록강 변의 벽동(온정리 서북방 75㎞) 방향으로 공격했다. 이때 동림산(1165m) 기슭에서 매복 중이던 중공군(제40군)으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후방이 차단되는 등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수행했다. 이날 박상구 병장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10월 25일에 사단과의 통신선 유지를 위해 출동 나갔다가 중공군으로부터 습격을 받고 즉각적인 대응을 했으나, 큰 피해를 받았다. 이날 그는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상구 병장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장병1묘역-104판-3688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1-ㅌ-05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