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삼호(朴三鎬)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5682
  • 전몰일자 : 19501125

공훈사항

박삼호 일병은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7월 초 제3여단 제6연대에 입대했다. 제6연대는 1948년 11·12월 발생한 연대 내 좌익세력의 반란사건으로 1949년 4월 15일 해체되고, 제22연대로 개칭되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제22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혼성 제3사단에 편성되어, 7월 1일 금곡리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일전을 벌여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연대는 7월 4일 제1사단에 배속되어 풍덕천 일대의 188고지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적의 압도적인 공격에 밀려 수원, 천안 일대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연대는 조치원-청주-보은 일대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의 남진을 저지했다.
동해안 축선의 위협이 증가됨에 따라 연대는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57호에 의거 제3사단으로 원대 복귀했고, 23일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을 했다. 7월 24일 영덕 남방의 강구에 도착한 연대는 26일 제3사단의 역습명령에 따라 강구 북방의 181고지와 207고지를 탈취하고, 곧이어 30일 제23연대가 탈취당한 영덕을 다시 탈환했다. 이후 8월 7일까지 연대는 이 일대에서 피·아 간에 뺏고 뺏기는 혈전을 계속했으나, 8월 8일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강구 남쪽으로 철수했다. 9월 22일 국군이 추격작전으로 전환함에 따라 사단도 추격작전을 실시하여 이날 흥해를 점령했다. 박삼호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적의 큰 저항 없이 평해-울진-삼척-강릉으로 일일 평균 17.3km의 경이적인 속도로 진격했다. 연대는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했고, 5일 치열한 격전 끝에 강력히 저항하는 적을 격멸하고 장전을 점령했다. 이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에 경계임무를 인계한 연대는 11월 4일 신북청으로 북상했다. 11일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였다. 이 진격전에서 박 일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다 11월 25일 혜산진 일대에서 북한군 패잔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삼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19판-2면-03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84-ㄱ-012)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 전사자 명부에는 소속이 제6연대로 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동 연대는 전쟁 발발 이전에 해체되어 제22연대로 개칭되었으므로 오기로 추정하여 제22연대로 조정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