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삼진(朴三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0085
  • 전몰일자 : 19500915

공훈사항

박삼진 일병은 경상남도 고성군 창원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던 1950년 8월 중순, 제주도 모슬포의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통신대 배치되었다. 그가 소속된 통신소대는 제2연대를 직접지원하고 있었다.
박삼진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8월 하순, 제6사단은 신녕 북방의 화산을 탈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차후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가 전입하기 전에 제6사단은 용기동∼307고지를 연하는 고지군을 점령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8월 12일 야간에 전면적인 철수를 단행해 위천 북쪽 1∼3㎞에 국통산∼324고지를 연결하는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8월 13일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장병들과 함께 격퇴했으나, 8월 18일 새벽 3시 무렵 적의 공격을 받고 격전 끝에 방어진지에서 퇴각했다가 주간에 역습으로 방어진지를 회복했다. 이후 8월 26일까지 국통산과 324고지, 169고지 일대에서 중요지형의 쟁탈전이 연일 계속되었지만 장병들은 공세적인 방어로 진지를 확보했다. 8월 28일에는 역부족으로 지연전을 수행하며 신녕 방면으로 철수하여 370고지에 배치되었다. 박삼진 일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사단과 연대 간에 통신 소통을 위해 전장을 누비며 동분서주했다.
북한군은 9월 2일에 국군 방어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9월 공세를 시작했다. 제2연대 장병들은 유엔군의 우세한 항공 및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아 격퇴하였으나, 또한 신녕 및 영천이 일시적으로 적에게 함락되는 등 위기가 닥쳤다. 연대는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돌파된 지역에 대해 강력한 역습으로 회복하였고, 북한군도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당시 통신대는 “원활한 통신소통 없이 승리는 없다.”는 신조로 제2연대에 적극적인 통신지원을 실시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부터 실시 예정인 낙동강방어선부터의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박삼진 일병이 소속된 통신소대는 반격작전을 위한 통신선 점검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로부터 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삼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6판-2면–034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0-ㅎ-044)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