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삼식(朴三植)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200850
  • 전몰일자 : 19510517

공훈사항

박삼식 대위는 1929년 7월 13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대위는 사병으로 복무하다 장교가 되고자 고급하사관 제2기로 육군 제병학교(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소정의 교육훈련을 받고, 1950년 9월 4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7사단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사단은 북한군 9월 공세 때 영천 전투에서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사단은 추격작전으로 전환했고, 제8사단을 후속하여 경주-안동-문경-수안보-충주-장호원을 거쳐 10월 7일 서울 청량리에 도착했다. 사단은 10월 8일 38도선을 돌파한 후, 김화-평강-곡산-평양 북방-개천으로 진격했다. 사단은 11월 초순 평안남도 개천 동북방의 비호산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침으로써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최초로 승리하는 부대가 되었다. 사단은 11월 22일 묘향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그 남방에서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혀 순천-승호리-신계-시변리-연천-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2월 15일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사단은 영월-평창-하진부리 축선에서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며 중공군의 제3~제4차 공세를 막아냈다. 1951년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사단은 인제 서쪽의 관대리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4월 공세(4. 22.~30.)에 밀려 인제 서남방 소양강 변의 정자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정자리 일대에 배치된 사단은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사단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하려 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해서 이곳에서 적의 돌파를 더는 허용하지 않고 진지를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수색중대는 사단의 측방 방호 임무를 수행했으며, 박 대위는 중대원을 진두지휘하여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5월 17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삼식 대위의 혁혁한 전공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1106 국)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33묘역-판-158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52-ㅂ-05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