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삼률(朴三律)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10518
  • 전몰일자 : 19500916

공훈사항

박삼률 일병은 1922년 11월 9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있을 때인 1950년 8월 16일 육군에 입대하여 미 지상군지원 한국군(KATUSA)으로 차출되어 근무하다가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국군은 긴급하게 소요되는 전투 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7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포기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에 입대하였다.
박삼률 일병의 입대를 전후한 전쟁 상황은 북한군의 기습남침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긴급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으로 낙동강까지 철수한 후 8월 초 포항으로부터 안동-영천-신령-칠곡-현풍-창녕-마산을 잇는 200㎞ 길이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박삼률 일병은 제1사단에 소속되어 칠곡군 가산면 일대에서 다부동 전투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제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에 5개 사단을 집중해 집요한 공세를 계속하고 있었다. 박 일병이 소속된 연대는 유엔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에 임했으며,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응전하였다. 연대는 수차례 반복된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그때마다 전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의 접근을 저지하였으나, 탄약이 소진되고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전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박삼률 일병이 방어 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반복되면서 북한군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그는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하였지만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투철하였다. 그러나 최후까지 용감하게 북한군을 방어하였던 박 일병은 1950년 9월 16일 황정리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이 쏜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삼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40판-7면-25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11-ㄴ-08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