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사흠(朴仕欽)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1612
  • 전몰일자 : 19500910

공훈사항

박사흠 일병은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사회적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12월 중순, 충북 청주의 제16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을 때, 박사흠 일병이 소속된 제16연대는 육본 명령에 의거 즉각적으로 제7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축석령으로 투입되었다. 축석령에서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의정부-창동을 거쳐 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러나 각각의 방어선에서 제대로 전투를 수행하지 못하고 한강교가 6월 28일 새벽에 파괴되자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이후 지연전에서 진천-청주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7월 20일에 함창에서 피해가 컸던 제2사단이 해체될 때, 박사흠 일병은 대구지구 방어사령부로 전속되었다.
육군이 11월 7일에 서울에서 제2사단을 재창설할 때에 박사흠 일병은 대구지구 방어사령부에서 제31연대 창설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그가 소속된 제31연대는 의정부 일대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북한군 패잔병에 대한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한편 국군과 유엔군 주력은 압록강을 향해 10월 말과 11월 말에 두 차례에 걸친 총공격(일명 추수감사절 공세)을 실시하여 통일을 달성하고자 했으나,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후방이 차단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12월 8일부로 전 부대가 북한지역에서 철수하여 38선 상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사단은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는 장병들과 함께 곧 닥쳐올 중공군 기습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수색정찰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중공군들도 부대별 선견대를 파견하여 차후 공격 방향을 정찰했다. 그가 소속된 소대는 12월 10일에 방어진지 전방에서 수색정찰 활동을 하다가 중공군 정찰대를 발견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전몰일자 1950-09-10은 제31연대가 창설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12월 10일로 조정했음)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사흠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16-ㅅ-10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