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사문(朴士文)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5800885
  • 전몰일자 : 19500801

공훈사항

박사문 일병은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광복 후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조국에 헌신하기 위해 1949년 8월 중순경 서울 용산에 위치한 육군직할 제1병참단으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자대로 충원되어 병참의 양적, 질적인 향상에 진력했다.
국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서쪽의 옹진반도에 배치된 제17연대로부터 동해안의 제8사단까지 전 전선에 걸쳐 받았다. 전방의 각 사단은 적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큰 피해를 입고 방어진지가 무너져 철수를 거듭했다. 특히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제1, 제7사단 지역의 적의 주공 방향이어서 피해가 더 컸고, 방어상태는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육본에서는 수도 서울 방어를 위해 후방에 위치한 3개 사단에게 대대 및 연대 단위로 집결되는 대로 투입하도록 했다. 그리고 우선 육군본부 직할의 모든 재경부대를 동원해 전방의 제1사단과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증강시키려 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병참단은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의정부 지역으로 출동했다. 제7사단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 무질서하게 철수하였고, 오전 11시경에 포천을 점령당했다. 이어 6월 26일 야간에 의정부가 함락되었다. 6월 27일 정오가 조금 지나면서 적 전차에 의해 창동방어선이 돌파되자 병력들은 소총으로 저항하며 서울 방어의 최후 저지선인 미아리고개로 후퇴했다.
북한군이 계속 남진하자 병참단은 각 전투부대를 밀접히 지원하면서 안양-수원-평택을 거쳐 7월 5일 대전으로 이동했고, 7월 11일 김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했다. 병참단은 7월 23일 포항 백원에 보급소를 설치하여 전선의 부대들을 적시적으로 지원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전을 실시하여 8월부터는 낙동강방어선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박 일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방 부대들을 밀접히 지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박 일병은 8월 1일 전방부대 지원을 위해 이동 준비하는 중에 적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적들을 격퇴함으로써 막대한 군수품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박사문 일병은 적탄에 맞아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사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명비(080-ㅍ-08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