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사남(朴四男)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21947
  • 전몰일자 : 19510523

공훈사항

박사남 일병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3차 공세로 평택-삼척 선으로 철수했떤 1951년 1월 중순,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12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제2사단 수색대에 배치되었다.
박사남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안동-속리산-제천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4월 28일에 청평 일대의 전방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군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고 조심스럽게 적정파악을 위한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하여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5월 9일에는 가평까지 진출했다. 이로써 중공군 4월 공세 당시에 상실했던 지역의 절반을 회복했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에서는 전 전선에서 반격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5월 10일을 전후하여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징후들이 포착되자 반격작전계획을 즉시 취소하고 방어로 전환하도록 했다.
제2사단은 가평 일대에서 중공군 공세에 대비하여 방어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중공군의 5월 공세가 5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산군의 작전목적은 주공을 동부 전선으로 지향해 그곳에 집중된 국군을 격멸하여 미군을 고립시킴으로써 향후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4월 공세와는 달리 양익포위를 발전시켜 3중으로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다중포위를 사용하고, 국군 후방의 주보급로를 다중으로 차단했다. 그러나 공산군은 그들이 의도했던 국군에 대한 3중 포위에 실패하고 곧 공세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에 아군은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박사남 일병이 소속된 수색대는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적 지휘소 및 보급소를 습격하는 임무로 적 후방을 교란했다. 그러던 중 수색소대는 5월 23일에 적 보급소를 습격하여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으나 적 부대의 반격으로 적진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사남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23묘역-3판-767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ㅅ-01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