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필(박봉필)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13434
  • 전몰일자 : 19510327

공훈사항

박봉필 일병은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을 실시하던 1950년 9월 23일, 경남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훈련소에 잔류하여 조교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함에 따라 병력 보충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병력 확보와 각 지역방위 임무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7월 초순, 각 도에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 확보와 더불어 후방지역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8월 14일에 육군본부 직할로서 육군 제1훈련소와 함께 경남 부산에 육군 제2훈련소가 설치되었다.
박봉필 일병이 육군 제2훈련소에 배치되었던 10월 하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고 있었고, 반면 훈련소는 부족한 병력보충을 위해 신병교육과 적 게릴라 소탕작전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부산 지역은 유엔군의 병력과 물자가 증원되는 항구이며, 임시 수도가 위치한 곳으로 아군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반면 적 게릴라들에게는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공격목표들이 많이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전환한 후에는 미처 도주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유엔군의 주요 병참선을 통제할 수 있는 주변 고지에 위치하며 후방교란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육군 제2훈련소는 신병훈련에 주력하면서도 동시에 인근에 출몰한 적들의 유격활동에 대응해야 했다. 이에 훈련소는 조교를 포함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해 왔다. 그러던 중 1951년 3월 27일 부산항 인근에 적 게릴라가 출몰했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박봉필 일병이 소속된 기동타격대는 즉각 출동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격멸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들의 기습사격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3판-32면-17271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5-ㅂ-108)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