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태(朴鳳泰)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25200
  • 전몰일자 : 19511030

공훈사항

박봉태 일병은 1929년 7월 21일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일병은 1950년 11월경 대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이어 제301공병교육대에서 공병 주특기 교육을 받은 후 제1103야전공병단에 배치되었다.
제1103야전공병단은 1950년 11월에 창설되어 1950년 10월 16일 창설된 제3군단에 배속되어 후방지역에서 12월 10일까지 잔적 소탕작전을 했다. 제3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5·8사단을 배속받아 최초로 가평-춘천 정면의 전선에 투입되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쳐 3차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군단은 강력한 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미 제8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영월로 철수했다. 이때 박 일병은 적탄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박 일병은 1951년 5월 하순경 부상에서 회복되어 제1201건설공병단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유엔군은 적의 5월 공세를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한 후, 공세로 전환했다. 유엔군은 5월 말에 세 번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중부전선에서는 와이오밍선(연천~철원~김화)을, 중동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신 캔자스선(화천저수지~펀치볼~향로봉~간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유엔군은 5월 말부터 캔자스선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6월에 1차 완성을 했다. 이때 1201건설공병단은 전방 사단 공병대대를 지원하는 한편, 보급로와 비행장 확장 및 신설 작업에 진력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이후 전투 양상은 대규모 작전 없이 고지쟁탈전으로 변모되었다. 이 시기 전선은 동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미군 군단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국군 공병부대는 동해안 지역에 집중 지원되었다.
제1201건설공병단은 동해안의 주문진 일대에서 주보급로 보수·유지에 주력했다. 박 일병은 용감하게 앞장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군 작전에 기여했으나, 1951년 10월 30일 주문진 일대에서 주보급로 보수 작업 중에 적의 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태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유해(장병4묘역-409판-49762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87-ㄹ-00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