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칠(박봉칠)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4103
  • 전몰일자 : 19501126

공훈사항

박봉칠 중위는 출생 일자 및 장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에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 등을 고려하여 작성했다. 그는 1950년 4월 21일에 경기도 시흥의 보병학교 갑종간부후보생 제2기로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남침을 했을 때, 육군보병학교는 교육 중이던 후보생들을 대대로 편성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갑종간부후보생 대대는 6월 26일에 김포지구로 출동하여 통진 동남쪽의 장림선을 점령하여 북한군 제6사단의 공격을 저지하다 부평으로 철수했고, 이후 갑종간부후보생 제2기들은 부산 동래에 긴급 설치된 육군종합학교로 8월 16일에 입교하여 2주간의 교육을 마친 후 9월 4일부로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박봉칠 중위는 제6사단 직할대인 수색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박봉칠 중위가 부대로 전입했던 9월 초순, 제6사단 장병들은 낙동강방어선의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북한군의 총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퇴각하는 북한군을 추격했다. 사단은 북한군의 저항을 격파하면서 함창-보은-괴산-충주-원주-횡성-홍천-춘천 방향으로 진격했고, 10월 5일에는 모진교에서 38도선을 돌파했다. 계속 화천-김화-금성-신고산-덕원-마식령-양덕을 거쳐 10월 19일에 성천을 점령했고, 21일에 순천-개천을 거쳐 23일에 희천 방향으로 진격했다. 박봉칠 중위가 지휘하는 수색소대는 사단 주력이 기동하기 전에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여 사단으로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6사단은 10월 24일 개시된 유엔군의 총공세에 참가했다. 25일에는 온정리에서 압록강변의 벽동, 초산 방향으로 진격하던 중 동림산(1165m) 기슭에서 매복 중이던 중공군(제40군)의 공격을 받아 후방이 차단당했다. 이에 기습을 당한 사단은 유엔군의 명령에 의거 험준한 산길을 돌파하여 11월 1일에 개천으로 집결했다. 이후 11월 14일에 영원-덕천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의 예비가 되었다.
국군 제2군단은 11월 24일에 개시된 유엔군의 2차 총공세에 참가하여 공격했다. 중공군은 이번에도 산속에 은거해 있다가 공격 2일차인 25일 야간부터 아군의 후방을 차단했다. 박봉칠 중위가 지휘하는 수색소대는 적정 수집이 주 임무였으나, 대규모 중공군으로부터 군단 지역 곳곳에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적의 차단선을 돌파하여 후방으로 철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는 11월 26일에 포위망을 돌파하는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칠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69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6-ㄹ-01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