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진(朴鳳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1902935
  • 전몰일자 : 19500702

공훈사항

박봉진 일병은 1928년 6월 1일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에 헌신하고자 1950년 4월 중순경 육군에 입대하여 기초 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수도사단은 1949년 6월 20일 서울시 용산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되었다. 당시 제1연대는 제7사단에 배속되어 동두천 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박봉진 일병이 소속된 수도사단은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동두천 축선으로 증원되었다. 북한군은 동두천 축선에 제4사단과 40여 대의 T-34전차를 투입해 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은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개전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서울의 방어가 위태로워졌다. 이에 육군본부는 서울 방어를 위해 수도권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방에 투입하도록 명령하였다. 북한군은 그날 오전 초성리를 돌파해 동두천으로 진격하였다.
박봉진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주저항선인 동두천 북쪽 소요산 일대의 진지로 철수하여 남하하는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면서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의 보전협동부대를 저지하였으나 서측으로 우회한 북한군의 위협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연대는 탄약을 재보급받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소속의 전차 수십 대를 앞세운 북한군의 총공격을 받아 소요산 일대의 주저항선이 돌파되기 시작하였고, 10시간에 걸친 혈전에도 불구하고 동두천 방면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일병과 연대병력은 6월 29일부터 한강 및 시흥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 제7사단의 남하를 6일간 지연시켰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용감하게 싸웠던 박봉진 일병은 1950년 7월 2일 노량진 부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유해(24묘역-6판-888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002-ㅌ-02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