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진(朴奉鎭)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2899
  • 전몰일자 : 19510627

공훈사항

박봉진 일병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1950년 11월 중순, 그는 제주도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5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재창설된 제2사단 직할부대인 수색대로 전속되었다.
박봉진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때, 제2사단은 의정부-포천-홍천 일대에서 후방교란을 실시하고 있던 북한군 패잔병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중 두 차례에 걸쳐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사단은 상급부대 명에 의거 후방지역 작전을 중단하고 포천 북방의 양문리-탑두울을 잇는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야간에 드디어 신정공세(일명 3차 총공세)를 시작하여 서울을 압박했다. 그는 사단 장병들과 방어진지를 사수하며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이미 적은 아군의 후방을 차단하며 포위 섬멸하고자 했다.
제2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의 공격을 하룻밤을 버티지 못하고 다음 날인 1951년 1월 1일 새벽에 진지에서 이탈하여 청평으로 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적들이 후방을 차단한 상태여서 전투하며 차단선을 돌파해야 했다. 그는 장병들과 함께 1월 3일에 청평에 도착하여 여주로 이동했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충주에 집결한 후 미 제10군단 예비사단으로 풍기에서 재정비하며 충주-단양 간 병참선을 경계했다. 그가 소속된 수색소대는 주로 병참선 주변에 대한 수색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2월 13일에 사단을 따라 안동으로 이동하여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잔적 소탕작전을 실시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후방지역작전을 완료하고 4월 28일에 청평 일대의 전방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군단은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즉각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제2사단은 육단리 방면으로 진격했고, 박봉진 일병이 소속된 수색소대는 적진에 침투하여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사단은 6월 중순에 육단리-적근산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수색소대는 6월 14일에 적진에서 보급소를 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아군 지역으로 복귀했다. 이후 주로 사단지휘소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6월 27일에 적 침투부대로부터 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진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2판-8면-14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ㄱ-03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