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재(朴鳳載)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22018
  • 전몰일자 : 19501225

공훈사항

박봉재 일병은 1924년 3월 13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에서 출생하였다. 박 일병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박 일병은 1950년 9월 3일 입대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으로 전입되었다가 육군의 부대조정에 의거해 제9사단 직할부대로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박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 연대는 7월 5일에 수도사단에 편입되어 7월 6일부터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 방면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군 제12사단은 제8사단의 뒤를 따라 계속 공격해왔다. 이에 연대는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안동전투에 투입되어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며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북한군의 1950년 9월 공세 당시, 제1연대는 경주 북방의 호명리 일대에서 9월 9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아군은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10월 10일 원산을, 19일 평양을 점령하며 계속 북진하게 되었다. 한편 아군이 북으로 진격함에 따라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잔류 병력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동시에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후방지역작전을 하던 미 제9군단과 예하 미 제2·제25사단은 청천강 선으로 투입되었다. 따라서 10월 15일 창설된 국군 제3군단이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9사단은 1950년 11월 15일에 전북 금산군 남이면에서 1개 대대 규모의 공비를 소탕했고, 동년 11월 20일에는 상용리에서 적 200여 명을 포획 섬멸했다. 이후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1950년 11월 23일부터 12월 17일까지 전북 대둔산 지구 및 충남 일대와 경북 서부지역 공비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또한 사단은 대둔산 대평리, 삼왕리를 포위 공격하여 산속 깊숙이 은거하고 있던 적을 소탕하고 적의 근거지를 제거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공비소탕작전에서 박 일병은 적탄을 맞고 후송되었으나, 1950년 12월 25일 끝내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재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7-ㄷ-046)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