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우(박봉우)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0621180
  • 전몰일자 : 19520508

공훈사항

박봉우 하사는 출생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로 38도선 일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1951년 6월 14일 입대하여 제주도에 위치한 육군 제1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했다. 이후 박봉우 하사는 포병으로 분류되어 전남 광주에 있는 육군포병학교에서 포병 주특기 교육을 받고 자대로 충원되어 교도대대(제2포병대대) 조교요원으로 배치되었다.
박봉우 하사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캔자스(Kansas)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과 그 북방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포병학교는 포병 장병 육성에 전력했다.
한편 포병은 1948년 6월 26일 서울 용산에 제2포병훈련학교를, 경남 진해에 제3포병훈련학교를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1월 20일 제2,3포병훈련학교를 해체하고 육군 잠정포병단을 설치하여 그 밑에 육군포병학교를 두었다. 포병단은 12월 15일 육군잠정포병사령부로 개칭되었고, 이는 1949년 6월 20일 다시 육군 포병연대로 개편되었으며, 포병연대는 동년 10월 15일 육군포병학교로 개칭되었다.
6·25전쟁 발발 후 포병학교는 해체되고 1950년 7월 3일 창설된 제1포병단을 9월 10일 부로 포병교육대로 개칭하여 포병부대 장병을 육성했다. 이후 9월 15일 포병교육대는 진해에 위치한 제7훈련소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51년 3월 10일 포병훈련소를 육군포병학교로 개편, 개칭하여 포병의 교육훈련을 일원화시켰다. 10월 30일에는 신병 교육훈련을 위해 제90혼성포병대대(155mm, 105mm, 75mm포)를 경상남도 진해에서 창설했는데, 박봉우 하사는 同 대대에 재배치되어 교육훈련에 전념했다. 포병학교는 11월 3일 진해를 떠나 전남 광산군 극락면 극락동으로 이동하여 확장되는 포병 교육에 만전을 기했다.
당시 포병학교가 위치한 광주는 상무대를 포함한 군사학교들이 위치하고 있었고, 철도 및 도로와 인접해 있어 적 게릴라들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었다. 적 게릴라들이 출몰했을 때 포병학교에서도 출동하여 소탕작전을 펼치곤 했는데, 학교는 조교를 비롯한 기간요원으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게릴라들의 공격에 대응해 왔다.
박봉우 하사는 신병교육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1952년 5월 8일 학교 인근에 게릴라들이 출몰하자, 기동타격대원들과 함께 이들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전투에서 박봉우 하사는 분대원을 이끌고 앞장서서 도주하는 게릴라들을 추격하다가 그들의 기습사격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우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25판-4면-02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6-ㄷ-105)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