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래(朴鳳來)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9721337
  • 전몰일자 : 19511009

공훈사항

박봉래 일병은 경기도 광주군 은주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하던 1950년 7월 중순, 경북 대구의 제25교육연대로 입대하여 단기간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6사단 제2연대로 배치되었다.
박봉래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8월 중순, 제6사단은 신녕 북방의 370고지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후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격퇴하고, 9월 16일부로 반격으로 전환했다. 제6사단은 10월 5일에 춘천 북방에서 38도선을 돌파하였고, 10월 26일에 압록강 변까지 진격했으나, 이후 중공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12월 중순에 동두천 북방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곳에서 사단은 1950년 12월 31일에 중공군의 3차 공세(일명 신정공세)로부터 5차 공세(일명 4월 및 5월 공세)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951년 6월 10일에 취봉(987고지)을 탈취하고, 6월 15일에 적근산-백암산까지 점령했다. 그러던 중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6월 23일에 휴전을 제안하고 유엔군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전선에서는 전투가 사라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제6사단은 8월 31일에 유엔군의 작전지침에 의거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고지에 대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했다. 이날 박봉래 일병이 소속된 제2연대는 백암산 전방에 위치한 등대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목표로 공격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9월 1일까지도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연대는 정비를 한 다음에 9월 21일부터 등산리 부근의 819고지-462고지를 재차 공격하여 28일에 탈취했다. 이날 그는 선두에서 용감하게 전투하던 중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9일에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5378 육)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4-ㅌ-046)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