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봉래(朴鳳來)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48426
  • 전몰일자 : 19500801

공훈사항

박봉래 일병은 충청남도 대전시 문화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음에도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중순, 서울 용산의 제17연대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예하 대대에 배치되었다.
박봉래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동년 11월 15일에 옹진반도로 이동하여 옹진지구전투사령부로 예속되어 제2연대로부터 38도선 경계임무를 인수했다. 얼마 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면적인 포격에 이어 그들의 제6사단 14연대와 제3경비여단을 투입하여 공격했다. 연대 장병들은 병력 및 화력의 열세를 무릅쓰고 지연전으로 저항하다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6월 26일 아침 부포항에서 해군 LST에 승선하여 인천으로 철수했다.
제17연대 장병들은 인천에서 대전으로 이동하여 육본 경비임무를 수행하다가 6월 30일 오산과 평택 사이의 갈곶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한편 미 지상군 중 최초로 투입된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나 7월 5일 아침에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받아 6시간 만에 붕괴되었다. 제17연대 장병들은 측방에서 방어하다가 보은-상주로 이동하여 국군 제1사단과 합류했다.
제17연대는 7월 17일에 상주 일대에서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북한군 제15사단 주력인 제45, 48연대가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화령장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박봉래 일병이 소속된 대대는 도로 양옆으로 병력을 매복시켰다. 북한군들은 아군의 매복 사실을 모르고 7월 18일 오후 매복지점 앞에서 경계를 소홀히 한 채 식사를 위해 집결하였다. 연대 장병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격을 집중하여 무방비 상태의 적을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당시 계속되던 후퇴 상황에서 장병들의 사기 앙양에 크게 기여했다.
박봉래 일병이 소속된 제17연대는 7월 25일부로 수도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어 예천-안동으로 이동했다. 수도사단은 8월 1일에 국군 제8사단의 안동 철수를 엄호했다. 이날 적들은 제8사단을 추격하여 섬멸하려고 했고, 제17연대는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애석하게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봉래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5판-2면-01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1-ㅅ-027)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