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복주(朴福柱)

  • 군별 : 경찰
  • 계급 : 경사
  • 군번 :
  • 전몰일자 : 19500727

공훈사항

박복주 경사는 1927년 9월 7일 경남 고성군 고성읍에서 출생했다.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경남도경 함양경찰서 소속으로 재직 중 함양에서 전사했다.
박 경사가 경찰에 입문할 무렵에는 제주 4·3사건(1948년)에 이어 이듬해 여·순 사건으로 인하여 안보적으로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정부는 북으로부터 유격대의 계속적인 침투와 함께 지방공비 세력이 증가하자 군·경 합동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단행하기로 했다. 토벌작전은 3단계(제1단계: 1949.10.30-11.30, 제2단계: 12.1-12.15, 제3단계: 49.12.16-1950.2.28)로 시행했으며, 박 경사가 소속된 경남경찰은 제2단계 기간에 참여하여 대대적인 포위 및 수색작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자 경찰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각 도(道) 경찰국이 즉각 전투태세로 전환하도록 지시하고, 군경 합동작전태세에 돌입했다.
아군 군경부대가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기까지 함양경찰은 주요 보급로·시설 경비, 오열 색출, 피난민 이동 통제·구호 임무를 수행했다. 중부와 서남부 측에서 북한군이 진격하자 함양경찰은 경남경찰부대의 일부로서 7월 21일 전북경찰과 함께 호남과 영남을 잇는 관문인 육십령 고개에 차단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7월 23일 북한군 제6사단의 일부가 정읍을 거쳐 광주로 남진하였으며, 일부는 7월 24일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군경부대는 진주·마산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6사단에 대비하기 위해 경남·전남·전북의 경찰병력 4,000명으로 전투편성을 한 후 지휘소를 함안군 군북면에 두고 미 제25사단, 한국 해병대와 합동으로 적과 대치했다. 7월 26일 경남·전북경찰부대의 저지선이 북한군 1개 연대규모의 공격에 의해 무너져 일부는 안의로 후퇴하고 일부는 석복으로 후퇴하여 차후작전에 대비했다. 충남병력(156명)은 안의로 기동하여 급편방어진지를 적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거창으로 철수했다.
7월 27일 경남도경은 경남도경 병력과 하동서 병력으로 하여금 육십령 탈환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의령으로 철수했다. 이날 박 경사는 휘하의 병력을 지휘하여 육십령을 탈환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집중사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복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096-ㅊ-05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