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복이(박복이)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1110931
  • 전몰일자 : 19500725

공훈사항

박복이 하사는 서울시 마포구 용강동에서 출생하였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49년 7월 2일 제1연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예하부대로 배치되었다.
제1연대는 1946년 1월 15일 경기 양주에서 창설되어, 1949년 5월 12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었다. 수도사단은 동년 6월 10일부로 제7사단으로 개칭되어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연대는 6월 12일 포천 지역 사직리에 습격한 북한군 200여 명을 격퇴시켰으며 6·25전쟁 발발 전까지 38도선 경계와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약한 병력과 장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여러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전방의 제1사단, 제6사단, 제7사단에 배속시켜 방어력을 강화했다.
박복이 하사가 소속된 제7사단은 적의 주공방향으로 판단된 의정부 축선의 양주군 적성에서 사직리까지 47km 정면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했다. 당시 사단은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병력면에서는 7배, 화력면에서는 18배나 우세한 적과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박 하사와 연대병력은 동두천-의정부-창동-미아리방어선에서 육탄공격까지 감행하면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전투력 열세로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내어주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선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노량진, 안양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으나, 전투력 손실이 심해 7월 5일 해체되어 제1연대는 제8・18연대와 함께 수도사단(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 예하부대로 재편되었다. 그 후 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실시하여 7월 6일부터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제1연대는 미군이 방어하고 있던 금강선과 대평리선이 위태롭고 또 청주 국사봉 방어선이 언제 돌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7월 17일 보은을 거쳐 7월 20일 안동부근으로 이동했다. 박복이 하사는 점촌 서북쪽의 유곡리 부근에서 7월 25일 적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복이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위패(28판-1면-226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명비(122-ㅈ-075)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