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복암(朴福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K1111173
  • 전몰일자 : 19501115

공훈사항

박복암 일병은 1923년 12월 1일 부산 해운대구 중동에서 출생하였다. 박 일병의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박 일병은 1950년 5월경 입대 후 카투사로 선발되어 미 제8군으로 전입되었다가 육군의 부대조정에 의거해 제9사단 직할부대로 배치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박 일병이 소속된 제1연대는 동두천 축선의 38도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후 연대는 7월 5일에 수도사단에 편입되어 7월 6일부터 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 방면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그러나 북한군 제12사단은 제8사단의 뒤를 따라 계속 공격해왔다. 이에 연대는 7월 31일부터 8월 1일까지 안동전투에 투입되어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며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했다.
박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낙동강 남쪽 반변천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 후, 1950년 8월 2일에 길안에서 방어선을 편성했다. 이에 북한군은 8월 5일을 기점으로 8월 공세를 개시했다. 연대는 진지 측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전투를 이어가며 의성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로서 의성-영덕 사이에 큰 전선의 공백이 발생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국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청송-죽장-기계 축선으로 남하해 8월 9일에 기계를 점령하고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했다.
북한군 1950년 9월 공세 당시 연대는 경주 북방의 호명리 일대에서 9월 9일까지 북한군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최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는 전황 속에서 제9사단은 10월 25일에 서울에서 제28·제29·제3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창설되었다. 한편 아군이 북으로 진격함에 따라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잔류 병력은 아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동시에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후방지역작전을 하던 미 제9군단과 예하 미 제2·제25사단은 청천강 선으로 투입되었다. 따라서 10월 15일에 창설된 국군 제3군단이 후방지역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 일병은 이후 진행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탄에 맞아 1950년 11월 15일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복암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67-ㅍ-030)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