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복수(朴福守)

  • 군별 : 육군
  • 계급 : 병장
  • 군번 : 9706846
  • 전몰일자 : 19510212

공훈사항

박복수 병장은 경상남도 청도군(現 밀양시) 청도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후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인 1950년 7월 하순경, 대구에 위치한 제7교육대에 현지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교육대 조교요원으로 자충되었다.
박복수 병장이 제7교육대에 조교 요원으로 남게 될 무렵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 공세를 힘겹게 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병교육에 전념하면서 교육대 방호 임무도 병행했다. 한편 국군은 1950년 7월 5일경 부대를 재편성할 때에 제5사단을 해체하고, 병력들은 제1, 2사단으로 통합했다. 그 후 사단은 10월 8일 대구에서 제27, 35, 36연대와 수색, 공병, 통신대를 예하부대로 재창설되었다. 이때 박복수 병장은 신병교육에 전념하다가 제5사단 통신대로 전속되었다.
박복수 병장이 제5사단으로 전속될 당시 국군과 유엔군 주력이 북진작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사단은 10월 13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영남 지역 후방지역작전에 투입되면서 적 게릴라들을 소탕했고, 이후 가평, 청평, 춘천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완수했다. 북진을 계속하던 아군은 중공군의 두 차례에 걸친 기습공격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어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이에 사단은 12월 5일경에 전방지역으로 투입되어 17번 국도상의 춘천 지역에서 평양-춘천 간 도로의 동측방에 대한 철수 부대 엄호작전을 실시했다. 이후 사단은 12월 13일부터 춘천 북방 38도선 일대의 전선 방어(탑두울-배후령)에 투입되어 방어편성을 했다.
사단은 1951년 1월 1일 새벽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받고 후방을 차단당하고, 1월 2일 밤에는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나 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가평을 거쳐 문막 동쪽으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북한군 제10사단이 제천-단양-안동까지 침투하자 사단은 문막 일대에서 제천-영월로 이동하여 방어 배치를 전환했다. 박복수 병장이 소속된 사단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를 저지한 다음 2월 5일부터 9일까지 적 방어거점을 돌파하고 북한군 제6사단의 지휘소가 위치한 횡성 일대 포동리를 점령했다. 다음날 사단은 홍천 우측방의 목표 점령을 앞두고 대규모 중공군의 기동을 확인하여 야간 방어로 전환했다. 마침내 2월 12일 아침 사단은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받고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제천 북쪽 강원도 영월군 주천리 일대 新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박복수 병장은 2월 12일 중공군의 공격 시 횡성 일대에서 분대원과 함께 후발대로 유선 회수 중 적 포격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복수 병장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유해(31묘역-판-25408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32-ㅁ-032)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