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복남(朴福男)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191707
  • 전몰일자 : 19510913

공훈사항

박복남 일병은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유엔군이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하여 반격을 준비하던 때인 1951년 3월 3일, 대구의 육군 제1훈련소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2사단 제31연대로 배치되었다.
박복남 일병이 부대로 전입했던 1951년 4월 초순, 제2사단은 안동 부근의 일월산과 보현산 일대에서 공비소탕작전과 병참선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후 사단은 안동에서 속리산-제천 일대로 작전지역을 확대하여 공비소탕작전을 완수하고, 4월 28일에 청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전방작전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미 제9군단은 중공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하고 조심스럽게 38도선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5월 10일을 전후하여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징후들이 포착되자 방어로 전환했다. 박복남 일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가평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는데, 예상대로 중공군 5월 공세가 5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제2사단은 5월 19일에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미 제24사단의 가평 진출을 엄호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용문산-대관령-강릉을 잇는 선에서 저지시키고, 5월 24일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반격작전에서 청평-가평을 연결하는 도로의 감제고지에 배치된 적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여 제압하면서 38도선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여 6월 15일까지 현재의 휴전선인 적근산-육단리-원동리 선까지 진출했다. 이즈음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유엔군사령부에서는 7월 말에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예하 부대에 공세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제2사단은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745고지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수령하고 8월 2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항공지원사격과 포병화력지원을 받아 745고지를 탈취했다. 이에 중공군의 필사적인 역습으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745고지를 최종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9월 1일부터 745고지를 다시 공격하여 3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끝에 탈취했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가 다시 계속되었다. 박복남 일병이 소속된 소대는 9월 13일 야간에 매복작전을 나갔다가 적 침투조를 발견하여 격멸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복남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34864 육)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장병1묘역-125판-11519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19-ㅁ-065)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