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훈(박병훈)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8800054
  • 전몰일자 : 19501008

공훈사항

박병훈 하사는 경상북도 경주군(現 경주시) 내남면 포석리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6·25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낙동강선까지 남진하면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10일 경상남도도 밀양에서 편성된 육군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에 현지 입대했다.
1950년 8월 육군본부에서는 동부전선의 포항지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동시에 상륙기습을 통한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하지만 가용부대가 없자 밀양에서 훈련 중이던 유격부대를 선정하였는데, 이 부대가 바로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 또는 제772부대)이었다.
대대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이명흠 대위가 주동이 되어 대구와 밀양 등지에서 모집한 대한청년단, 학도병 등 772명으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된 대대였으나 적 기만과 부대원 사기를 고려하여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호칭하여 제28·29·32·37연대로 위장 편성하고, 계급도 위장했다.
대대는 영덕 지구에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을 교란함과 동시에, 인천 상륙작전을 기만할 목적으로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LST 문산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새벽에 장사동 부근 해상에 도착했다. 대대는 태풍 케지아로 인한 높은 파도와 아군의 상륙을 알아차린 북한군의 포격으로 완전히 육지에 착안하지 못하고 해안에서 2, 30미터 떨어진 상태에서 상륙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이 문산호와 상륙 중인 아군에 대해 집중 사격을 가해옴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문산호까지 닻이 끊어지며 파도에 휩쓸려 좌초되었다. 대대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오전 9시경 상륙을 완료했다.
박병훈 하사와 부대원들은 상륙 후에도 적에게 포위되어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적진 속에 고립된 가운데에서의 전투에는 한계가 있었다. 육군본부는 이 대대의 철수를 결정하였고, 9월 19일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한·미 해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작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670명을 구출하여 부산항으로 귀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병훈 하사는 적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8일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훈 하사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위패(36판-5면-087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설치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23-ㅇ-073)에 그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