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호(박병호)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09606
  • 전몰일자 : 19510211

공훈사항

박병호 중위는 출생 일자 및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박 중위는 1950년 3월경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 후 갑종간부 제1기생으로 임관하여 제8사단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의 부대 전입 당시 제8사단은 단양, 제천 등 총 8개 군 지역에서 북한의 무장유격대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4월 22일까지 시행되었던 공비토벌작전은 북한유격대와 공비들을 전부 소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군 제5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이에 강릉에 주둔해 있던 제8사단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연전을 펼쳤지만 적의 화력에 주문진을 상실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박 중위가 속한 제8사단은 1950년 8월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였다. 9월에는 국군의 총반격 작전에 합류하여 10월에는 북한지역 깊숙이 진출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장은 새로운 국면에 봉착되었다. 제8사단은 적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구장동 일대에 배치되었는데, 이때 청천강으로 철수하라는 요청에 제8사단은 영원방면까지 철수하였다.
제8사단은 1950년 11월 23일 맹산에 전방지휘소를 개설하고 묘향산 동쪽의 영원과 맹산 지역에서 중공군 제42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또 한 번의 방어 전투에 돌입했다. 이후 제8사단은 1950년 12월 1일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쪽의 상동에서 38도선을 향하여 철수를 거듭하여 율리에서 수안을 거쳐 신계, 시변리를 경유해 토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8사단은 38도선의 바로 북방에 위치한 520고지의 점령을 위해 연천에 집결해 520고지를 향하여 돌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에 비해 열세한 화력과 적군의 우회 침입 작전에 직면하여 위기에 놓였으나 필사적으로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철수를 완료한 제8사단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강원도 화천군 내평리에서 적군을 대적했으며, 정면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이 진격해 왔다. 장병들은 진지 구축도 불가능한 혹한에서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며 적에 대한 지연전을 실시했다.
아군은 전력을 가다듬어 2월 5일부터 국군 제5사단과 함께 홍천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중공군 제198사단의 저항에 봉착하였고, 이 전투에서 박 중위는 1951년 2월 11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호 중위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02판-4면-5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9-ㄹ-08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