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호(朴炳浩)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61630
  • 전몰일자 : 19500712

공훈사항

박병호 일병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1949년 말부터 북한의 남침 우려가 커져가는 가운데 대한민국을 지키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1950년 2월경에 의정부 축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3연대에 입대했다. 박 일병은 적의 주요 접근로를 방어한다는 자부심으로 진지공사와 훈련에 적극 임했다. 제3연대는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박 일병이 소속된 제3연대는 동일 11시부로 제7사단에 배속되어 포천 후방의 송우리 전선에 투입되었다. 제3연대가 투입된 포천 축선은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지역으로,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107·109전차연대가 남침 첫날 포천 일대의 제7사단 주저항선을 돌파하여 남진하고 있었다. 제3연대는 태봉산(182고지)과 해룡산 동남쪽의 178고지에 진지를 편성했다. 6월 25일 저녁 무렵 송우리에 접근한 북한군은 T-34 전차를 앞세우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병력,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한 가운데 이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는 아군은 분전했으나,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그날 야간에 창동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연대(-)는 26일 창동 방어선의 일부인 우이동의 154고지, 62고지에 투입되었다. 27일 아침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접근하자 아군은 사격을 집중했으나, 적의 전차는 전혀 피해 없이 아군의 포화 속을 뚫고 남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실탄이 바닥난 연대는 분산 철수하여 한강을 도하할 수밖에 없었다.
박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29일부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혼성 제2사단에 편성되어 역삼리 일대의 한강방어선과 과천 일대에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7월 2일 연대는 이 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하고, 군포 근처의 348고지에 배치되어 아군 수도경비사령부와 제7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후 수원으로 철수했다. 이날 전투에서 박 일병은 내 손으로 조국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7월 12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호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22판-2면-061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48-ㄷ-02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