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철(박병철)

  • 군별 : 육군
  • 계급 : 대위
  • 군번 : 203451
  • 전몰일자 : 19510211

공훈사항

박병철 대위는 출생 일자 및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몰 일자를 고려할 때, 박 대위는 1950년 3월경 갑종간부 후보생으로 임관하여 제8사단에 배치되었다. 박 대위의 부대 전입 당시 제8사단은 단양, 제천 등 총 8개 군 지역에서 북한의 무장유격대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1950년 4월 22일까지 시행되었던 공비토벌작전은 북한유격대와 공비들을 전부 소탕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토벌 작전을 마친 제8사단은 강원도 강릉으로 이동하여 경계 작전을 수행했다.
북한군 제5사단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이에 강릉에 주둔해 있던 제8사단은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연전을 펼쳤지만 적의 화력에 주문진을 상실하고 철수를 시작했다. 박 대위가 속한 제8사단은 1950년 8월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였다. 9월에는 국군 총반격 작전에 합류하여 10월 3일 서울에 도달하고, 10월 9일 연천 남방에 도달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장은 새로운 국면에 봉착되었다.
이후 제8사단은 1950년 12월 1일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쪽의 상동에서 38도선을 향하여 철수를 거듭하여 율리에서 수안을 거쳐 신계, 시변리를 경유해 토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8사단은 38도선의 바로 북방에 위치한 520고지의 점령을 위해 연천에 집결해 520고지를 향하여 돌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에 비해 열세한 화력과 적군의 우회 침입 작전에 직면하여 위기에 놓였으나 필사적으로 포위를 뚫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철수를 완료한 제8사단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강원도 화천군 내평리에서 적군을 대적했으며, 정면으로 중공군 3개 사단이 진격해 왔다. 장병들은 진지 구축도 불가능한 혹한에서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며 적에 대한 지연전을 실시했다.
아군은 전력을 가다듬어 2월 5일부터 국군 제5사단과 함께 홍천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지만 홍천군 삼마치 고개 및 오음산 고지를 선점한 중공군 제198사단의 저항에 봉착했다. 이후 국군은 5일간 제병협동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전선돌파에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특히 제8사단의 피해가 컸다. 이 전투에서 박 대위는 1951년 2월 11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철 대위의 공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22판-1면-206호)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9-ㄷ-083)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