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직(박병직)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249435
  • 전몰일자 : 19510618

공훈사항

박병직 일병은 1928년 10월 2일 충청북도 보은군 화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고자 일어섰다. 박 일병은 1951년 2월 5일 부산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제7사단 제5연대에 배치되었다.
박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3차 공세를 맞아 37도선 일대에서 공방전을 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영월 일대에서 적과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유엔군의 킬러작전(2. 21.~3. 6.) 때, 연대는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유엔군의 리퍼작전(3. 7.~3. 31.) 때 연대가 소속된 제3군단은 조공으로 공격했고, 연대는 평창군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하여 경강국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연대는 지역 내 잔적을 소탕하면서 속사리-창촌-현리 방향으로 계속 진격하여 3월 하순에는 현리 일대까지 진격하여 적과 대치했다.
4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고, 연대는 공격을 전개하여 4월 22일 인제군 원통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때 중공군은 제5차 공세(4월 공세)를 시작했고, 제5연대는 4월 23일 제5사단에 배속되어 방어로 전환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제5연대와 제3사단 제22연대의 전투지경선을 집중 공격했다. 연대는 격전을 벌이면서 분전했지만 측방이 노출되면서 전투력의 열세에 밀려 인제 서남방의 부평리, 소재 일대까지 후퇴했다.
5월 16일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고, 소양강 변의 부평리, 구만리에 배치된 연대는 중공군 제79·8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연대 장병들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압도적인 적의 공격에 밀려 5월 18일에는 풍암리까지 후퇴했다.
중공군의 5월 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이때 연대는 6월 7일부터 12일까지 양구 서북방의 군량현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신 캔자스선’ 상의 마석봉-504고지-757고지를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연대는 양구 일대에서 고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박 일병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6월 18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직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18-ㅎ-03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