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박병준(박병준)

  • 군별 : 육군
  • 계급 : 중위
  • 군번 : 211445
  • 전몰일자 : 19510317

공훈사항

박병준 중위는 출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박 중위는 장교가 되고자 육군보병학교에 보병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50년 12월경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7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박 중위가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청천강 선에서 37도선 일대로 철수하고 있었고, 제7사단도 영변까지 진격했다가 후방으로 철수 중이었다. 사단은 12월 3일부터 승호리 일대에서 신계-시변리-연천을 거쳐 12월 15일까지 춘천으로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춘천 동북방의 38도선 일대에서 방어진지 구축했다.
12월 31일 중공군은 제3차 공세를 시작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평택-삼척을 연결하는 37도선 상에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때 사단 장병들은 북한군 제10사단을 맞아 분전했으나, 주진지가 돌파됨에 따라 자은리를 거쳐 횡성 북방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제5군단이 원주 지역에 깊숙한 돌파구를 형성함에 따라 사단은 또다시 철수하여 1951년 1월 8일 영월 북서방의 서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영월로 진출했고, 사단은 1월 19일부터 24일까지 치열한 교전 끝에 영월을 탈환하고 적을 섬멸했다. 2월 11일 개시된 중공군 제4차 공세(2월 공세) 때, 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의 집중 공격에 평창 일대까지 내주고 후방으로 후퇴했으나, 영월에서 17~18일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사단은 2월 21일 공세로 전환하여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 3월 6일 평창군 백석산 일대까지 진출했다.
유엔군의 리퍼작전(3. 7.~3. 31.) 때 사단이 소속된 제3군단은 조공으로 공격을 했고, 사단은 3월 6일 하진부리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사단은 평창군 백석산과 백적산 일대에서 북한군 제27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월 12일 하진부리를 점령했다. 박 중위는 공병대원으로서 방어전투에서는 제일 늦게까지 장애물을 설치했고, 공격전투 때에는 가장 앞에서 적의 장애물을 제거해 왔다. 그는 이 진격전에서도 소대원을 이끌고 선두에서 적 장애물을 탐색하다 3월 17일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박병준 중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47판-8면-030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118-ㅂ-009)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